종보 독서록

<무지한 스승>을 다시 읽다.

종보샘 2018. 4. 10. 20:50
<무지한 스승>을 다시 읽다. 

내가 잘못했다. <무지한 스승>의 내용을 곡해했다. <무지한 스승>의 내용을 요약하려 다시 읽고 출판사 서평을 읽었다. 핵심요지가 출판사 서평에 모두 나와 있어서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나의 경험에서 <무지한 스승>을 다시 해석하고 번역하려 한다.

나의 경험, 과외의 경험, 교실에서의 경험, 과학고 강의 경험.

  1. 나의 경험
 나는 무언가를 배우려 하면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능력이 있고 노력을 하면 무엇이든 배울 수 있다.’는 말을 나에게 건넨다. 나에게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가르친다. 그것과 관련해서 인터넷 검색을 하고 책을 읽고 모방하고 실제로 적용해보고 다른 이들도 그렇게 사용하는지 검증해보고 그 결과가 다르면 왜 다른지 생각해보고 되풀이한다. 
    
    “관찰하기, 기억에 담아두기, 되풀이하기, 검증하기, 알려고 하는 것과 이미 아는 것을 연관시키기, 행하기, 행한 것에 대해 반성하기”-25쪽

 그러다보면 어느새 그것을 익히게 된다. 전문가와 대화가 되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내가 그것을 배우지 못하는 것은 의지가 사그라들 때이다. ‘시간이 없어서’, ‘흥미가 떨어져서’, ‘더이상 배우고 싶지 않아서’ 안배우는 것이다.

  1. 과외의 경험
 대학교 2학년인가, 3학년 때일 것이다. 같은 과 친구의 추천으로 모텔 주인집의 고등학생 아들의 과외를 하게 되었다. 그 학생과 부모는 나를 통해서 학업성적을 올리고자하였다. 나는 그 학생을 지도하였다. 그 학생은 내가 설명해주는 학습법을 익히고 시험문제를 푸는 요령, 시간관리법 등을 내가 인도하는대로 따랐다. 그런데 과외학생은 그저 그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스스로 무언가를 할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너무 답답하였다. 그래서 나의 경험을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중학생 때까지 반에서 중위권의 성적이었다. 방황도 많이 하고 다녔다. 그러다가 마음을 다잡고 고등학교에 가서는 공부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먼저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을 관찰하고 그들을 따라하며 여러 학습법과 관련된 책을 읽고 문제집을 풀고 수학실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초등학교 수준부터 다시 공부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그 노력과 열정으로 학생회장이면서도 전교 1등을 하고 교육대학교에 들어갔다. 결국엔 하고자하는 의지다. 이것은 내가 해줄 수 없다. 스스로 하는거다.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그 학생에게서는 열정과 의지가 보이지 않았고, 부모에게서 과외를 더이상 하지 않겠다는 통보가 왔다.

  1. 교실에서의 경험
 교실에서 수업을 하면 교사의 설명 보다 활동을 통해 학생들이 그 원리를 깨치는 것을 본다. “좋은 수업은 교사의 말하는 시간이 적은 수업이다.”라는 말이 있지 않나. 한번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고 사각형의 내각의 합은 360도이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각도 수업(이것은 교과서에서는 2차시로 편성되어 있다.)이 있었다. 나는 색종이를 다양하게 오려서 삼각형과 사각형의 각도의 합을 구해보고 거기서 더  나아가 다각형 각도의 합의 규칙성을 찾아 공식으로 만들어보라고 하였다. 활동 중에 “선생님. 모르겠어요. 난 이런거 몰라요.”라고 말하며 자신의 무지를 주장하는 학생을 만났다. 난 “아니야. 넌 할 수 있어. 일단 삼각형을 만들어서 모서리를 찢어봐. 각도기로 각도를 재봐. 봐. 할 수 있잖아. 하나씩 하면서 규칙성을 찾아봐. 넌 할 수 있어.”라고 독려하였다. 결국 그 학생은 규칙성을 찾고 자기만의 언어로 규칙성을 말하였다. “삼각형이 180도, 사각형이 360도니까 오각형은 540도다.” 



  1. 과학고 강의 경험
 교실에서의 경험은 랑시에르가 진보론자나 계몽주의자를 비판하는 것과 같이 의지의 관계와 지능의 관계가 일치한다. 그래서 나의 ‘무지한 스승’ 경험 중에 과학고 강의 경험을 되짚어 보았다. 과학고에서 아두이노 강의를 부탁받았다. 나는 학생들에게 강의를 시작할 때 말하였다. “나는 사실 아두이노에 대해 잘 모른다. 단지 아두이노를 가지고 이것저것 만들어본 경험을 해보았을 뿐이다. 솔직히 너희들이 나보다 C언어도 잘 알고 코딩도 잘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너희들이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드는 시간으로 하려고 한다. 니들이 알아서 만들어라. 난 그냥 먼저 해본 경험으로 그것이 가능할지, 필요한 것은 무엇이있는지 같이 생각해볼 뿐이다.” 그러고 이 학생들에게 맡겼다. 학생들과 같이 나도 검색하고 그것이 가능한지 단계를 나누어 검증해보고 같이 배우고 같이 해나갔다. 물론 많은 학생들이 지쳐갔다. 하지만 몇몇 학생들은 아두이노를 익히고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을 익혔다. 그들은 스스로 배웠다. 

 과학고의 강의경험도 ‘무지한 스승’이라 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지능의 관계가 일부(먼저 해보았다는 선경험)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수가타 미트라의 실험은 ‘무지한 스승’의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다. “수가타 미트라: 스스로를 교육하는 법에 대한 새로운 실험 | TED Talk” ( https://www.ted.com/talks/sugata_mitra_the_child_driven_education/transcript?language=ko )

 자크 랑시에르의 ‘지적해방’에 관한 것은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은 지적으로 평등하다’는 전제아래 배움에의 의지를 복돋우며 노력하는 모든 시도들 마저도 ‘뿌리내리지 못할 것’이라 하기에 출구도 없고 희망도 없다는 답답함을 느낀다. 그러기에 마지막에는 저항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리다. 


<무지한 스승>을 읽고. 난 알고 넌 모른다는 지적불평등(엘리트주의)에 저항해 노동자 스스로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랑시에르. 그의 책을 읽고 간단히 써보았습니다.
“탕수육은 뭐니뭐니해도 부먹이지.”
“아, 이 사람이 뭘 모르는구만. 찍먹이 진리야!”
두 사람이 탕수육을 어떻게 먹어야 맛있는지 말싸움을 벌였다. 그걸 지나가는 사람들을 불러 세워서 물어보니 부워먹는게 맛있다는 쪽이 3, 찍어먹는게 맛있다는 쪽이 7이었다. 찍먹쪽에서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려는 찰나 부먹쪽에서 한 사람이 나섰다.
“우리 같이 맛을 잘 모르는 문외한들이 설왕설래 해본들 무슨 소용있겠소? 전문가인 혀준 선생에게 물어봅시다.”
그리하여 미식가로 소문이 난 맛칼럼리스트 혀준에게 부먹인가 찍먹인가를 물어보았다.
“본디 맛이라는 것은 단맛, 쓴맛, 짠맛, 신맛, 감칠맛, 이 다섯가지를 미각이라하고 매운맛은 통각으로 우리 혀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고 몸에서 아프다고 느끼는 감각입니다. 찍어 먹게 되면 그 양념이 탕수육의 표면에 겉돌면서 맛이 안에까지 스며들지 못합니다. 이 탕수육의 경우는 부먹이 맛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자기 맛이 혀준과 닮았다느니, 여태껏 자기는 속고 살았다느니 부먹쪽은 으스대고 찍먹쪽은 꼬리를 내렸다.
이걸 보고있던 한 노숙자는 이렇게 말했다.
“부먹이든 찍먹이든 사람은 모두 평등한 미각을 가지고 태어났다네. 맛을 가르치려는 사람으로부터 해방되게나. 누구나 보편적 가르침으로 이 맛을 배울 수 있네. 곰곰히 생각하면서 먹고 또 먹어보게나.”
사람들은 왠 미치광이가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여기며 그를 무시했다. 그렇게 부먹으로 맛 평가는 끝나는가 싶었는데 중국집 왕사장이 나타나,
“아니! 부먹과 찍먹은 개인이 맛있다고 느끼는 대로, 먹고 싶은 대로 먹는거지 거기에 무슨 진리가 있어? 난 아침엔 부먹이 맛있고 저녁엔 찍먹이 맛있더라! 먹고 싶은대로 먹어!”
라고 하며 부먹과 찍먹을 모두 가져가버렸다.
내가 생각하는 “무지한 스승”은 이런 것이다. 진리라고 강요하는 권위주의자, 그리고 권위에 저항하고 인민을 계몽하려는 계몽주의자(진보론자), 둘 모두를 부정하는 해체론자. 사회, 문화, 역사 등 합의된(구성주의적) 탁월함 마저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무엇을 가르치고 배운단 말인가. 궤변이다.


목차

일러두기

제1장 어떤 지적 모험
설명자의 질서
우연과 의지
해방하는 스승
역량의 고리

제2장 무지한 자의 수업/교훈
책의 섬
칼립소와 열쇠공
스승과 소크라테스
무지한 자의 힘
각자의 일
장님과 그의 개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

제3장 평등한 자들의 이성/이유
두뇌와 잎사귀
주의 깊은 동물
지능의 시중을 받는 의지
진실함의 원리
이성과 언어
그래,나도 화가다!
시인들의 교훈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

제4장 무시의 사회
무게의 법칙
불평등에 대한 정념
수사적 광기
우월한 열등자들
철인왕과 인민 주권자
어떻게 이성적으로 헛소리할까?
아벤티누스 위에서 한 말

제5장 해방하는 자와 그의 원숭이
해방하는 방법과 사회적 방법
인간 해방 그리고 인민 지도
진보적 인간들
양과 인간
진보론자들의 고리
인민의 머리 위에
구식의 승리
애 취급된 사회
판에카스티크의 콩트들
해방의 무덤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교육학의 신화는 지능을 열등한 지능과 우월한 지능으로 분할한다. 
교육 논리가 전제하는 근본적인 ‘불평등’과 그에 대한 무지한 자들의 ‘동의’야말로 
지적 능력을 실행하는 데 장애물이 된다. 

교육의 문제를 지적 능력의 평등이라는 철학적·정치적 문제로 
옮겨 사유한 랑시에르의 지적 모험! 

이 책은 프랑스 혁명 이후 부르봉 왕가가 복귀하는 바람에 네덜란드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조제프 자코토가 1818년 루뱅 대학 프랑스문학 담당 외국인 강사가 되어 학생들과 수업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자코토는 네덜란드어를 몰랐다. 그는 마침 출간된 페늘롱의 『텔레마코스의 모험』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판을 소개하면서 이 책을 이용해 프랑스어 텍스트를 익히라고 주문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프랑스어의 가장 기본적인 것도, 심지어는 철자법과 동사변화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아는 단어에 상응하는 프랑스 단어와 그 단어들이 어미변화하는 이치를 혼자서 찾아냈다. 우연히 시작된 이 실험은 기대 이상이었다. 자코토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읽은 내용에 대해 생각한 바를 프랑스어로 써보라고 했다. 학생들의 프랑스어 구사 수준은 놀랍게도 거의 작가 수준에 도달한 상태였다. 

자코토는 이 실험을 통해 다음의 사실을 명확히 했다. 학생을 해방한다면, 다시 말해 학생이 그의 고유한 지능을 쓰도록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 스승이란 자의적 고리 안에 지능을 가두어두는 자다. 무지한 자를 해방하기 위해서는 본인 스스로 해방되어야만 한다. 즉 인간 정신의 진정한 힘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자코토는 자신의 학습 방법을 ‘보편적 가르침’이라고 불렀다. 그후 자코토의 수업 이야기를 들은 수많은 학생들이 각 지역에서 그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몇 년 동안 그의 방식을 놓고 논쟁이 거세게 일기도 했다. 

알튀세르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 프랑스 철학계를 이끄는 자크 랑시에르는 왜 1987년에 『무지한 스승』을 쓰면서, 1818년의 이 이야기를 먼저 언급했을까? 이 책이 출간되었던 때의 프랑스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살펴보면, 1981년에 사회당 출신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이 된다. 당시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된 사바리는 지배 계급이 특권적으로 누리는 고급문화의 구별 짓기가 학교에서부터 작동하며, 그로부터 상징폭력이 재생산된다고 보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인교육이 필요하고, 학내에 평등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조성해야 하며, 계급간 학력 격차를 축소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진보적인 사회주의 성향의 교육 개혁 방안이었다. 

그러나 사바리에 이어 1984년 교육부 장관이 된 장-피에르 슈벤느망은 ‘공화주의’ 성향이 강했다. 그는 프랑스어 기초 수업 강화, 시험 및 선별 제도 강화, 공민 교육 강화를 주장했다. 이는 장-클로드 밀네르의 책 『학교에 대하여』(1984)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밀네르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스승과 제자의 불평등한 관계가 오히려 학생으로 하여금 학습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학교에서 평등을 실현한다는 명목으로, 뒤처지는 아이들을 위해 지도 방식을 하향평준화해서는 안 된다. 똑같이 가르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학생들을 선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공화적 엘리트주의, 스승과 제자의 불평등 그리고 지식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방안이다. 

랑시에르는 진보적 사회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의 이 첨예한 논쟁 속에 ‘자코토의 모험’을 삽입하여 논쟁 지형 자체를 바꾸어버린다. 자코토의 입을 빌어 랑시에르는 사회주의자들이나 공화주의자들이나 현실적인 불평등에서 출발해서 평등이라는 목적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그 둘은 똑같이 지적 능력의 불평등을 무한정 축소할 수는 있으되, 결코 평등에 도달하지는 못할 것이라고도 덧붙인다. 그는 평등에서 출발해야 하며 지적 능력의 평등은 하나의 공리이며 그것은 끊임없이 입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랑시에르는 이처럼 논쟁의 지형을 1980년대 프랑스의 교육 문제에서 1차로 19세기 자코토의 교육 방법으로 옮기고, 2차로 교육의 문제를 지적 능력의 평등이라는 철학적·정치적 문제로 옮긴다. 

무지한 스승, 지적 해방, 지능의 평등 
조제프 자코토는 우연한 실험을 하기 전까지 스승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학생들에게 자신이 가진 지식을 전달하여 그들을 스승의 수준만큼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스승의 전통적인 행위는 바로 ‘설명하는 것’. 그러나 앞의 우연한 실험을 통해 자코토는 설명자가 가진 체계의 논리를 뒤집었다. 그는 설명의 원리를 ‘바보 만들기’의 원리라 칭했다. 설명은 교육자의 행위이기에 앞서 교육학이 만든 신화이며, 유식한 정신과 무지한 정신, 성숙한 정신과 미숙한 정신,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로 분할되어 있는 세계의 우화라고 여기게 되었다. 또한 랑시에르는 소크라테스주의가 이러한 바보 만들기의 개선된 형태라고 말한다. 모든 유식한 스승처럼 소크라테스는 지도하기 위해 질문한다. 하지만 인간을 해방하고자 하는 자는 인간의 방식으로 상대에게 질문해야지 식자의 방식으로 질문해서는 안 되며, 지도받기 위해서 질문을 해야지, 지도하기 위해서 질문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아이는 자신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의지가 충분히 강하지 않을 때 스승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예속은 순전히 한 의지가 다른 의지에 예속되는 것이다. 예속이 하나의 지능과 다른 지능을 연결할 때 그것은 바보 만들기가 된다.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에는 두 의지와 두 지능이 있다. 그것들의 일치를 바보 만들기라고 부를 수 있다. 자코토의 수업에서 학생은 하나의 의지(자코토의 의지)에 연결되고, 하나의 지능(책의 지능)에 연결된다. 이 둘은 전적으로 구분된다. 랑시에르는 의지의 관계와 지능의 관계의 차이가 인정되고 유지되는 것을 ‘해방’이라고 부른다. 의지가 다른 의지에 복종한다 할지라도, 한 지능의 행위가 바로 자신의 지능에만 복종하는 것이 해방인 것이다. 가르치는/배우는 행위는 다양하게 조합되는 네 가지 한정을 따라 산출될 수 있다. 해방하는 스승이냐 아니면 바보로 만드는 스승이냐, 유식한 스승이냐 아니면 무지한 스승이냐. 

자코토의 실험은 스승의 앎이 학생을 지도한 것이 아니며, 자신이 모르던 것을 가르치는 것을 막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스승’을 ‘무지한’이라는 단어와 역설적으로 결합하여 ‘무지한 스승’이라고 불렀다. 무지한 스승은 학생에게 가르칠 것을 알지 못하는 스승이다. 그는 어떤 앎도 전달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의 앎의 원인이 되는 스승이다. 그는 불평등을 축소하는 수단들을 조정한다고 자처하는 불평등의 사유를 모르는 스승이다. 

자코토가 제안하는 보편적 가르침은 한 개인이 다른 이에게 설명해달라고 할 수단을 갖지 못한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모든 상황에서 날마다 멈추지 않고 입증된다. 무언가를 혼자 힘으로,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 배워보지 못한 사람은 지구상에 한 명도 없다.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스승의 앎이나 학식을 전달하고 설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지능이 쉼 없이 실행되도록 강제하는 의지에 달려 있다. 선생의 의지는 학생의 의지를 강제하지만, 그것을 무화시키지 않는다. 스승이 학생에 대해 갖는 반-권위적 권위 속에서 학생은 그의 지능마저 스승의 지능에게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율적으로 책의 지능과 씨름한다. 스승은 학생더러 구하던 것을 계속 구하라고 명령함으로써 학생의 앎의 원인이 된다. 따라서 스승의 의지와 학생의 의지가 관계 맺고, 학생의 지능과 책의 지능이 관계 맺는다. 랑시에르는 의지와 지능의 관계의 이러한 분리가 ‘지적 해방’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무지한 스승은 도발적인 방식으로 지적 해방을 제안하고 있으며, 이를 주장하기 위해 지능의 평등에 대한 의견 혹은 공리를 가지고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랑시에르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평등에 대한 사유다. 그는 오늘날 무지한 스승이 누구 혹은 무엇인지 묻거나 또는 개인을 지적으로 해방하는 독학 방법과 제도 교육을 대립시키는 것이 관건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지능의 평등에서 출발하는 논리와 지능의 불평등을 가정하고 그 불평등을 무한정 축소하겠다고 말하는 진보의 논리를 맞세우는 것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또한 랑시에르는 이 책에서 근본적인 지적 악(惡)은 ‘자기 무시’라고 말한다. ‘나는 이해 못 하겠소.’란 말은 ‘나에겐 그것이 필요 없소.’라고 토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나는 나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자리에 부합하는 것을 알면 충분할 뿐 그 이외의 것은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사회에서 배분된 자리들이 우연적이고 자의적이며,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지배자고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피지배자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그 평등한 능력, 능력의 평등에 기초할 때에만 ‘민주주의’로서의 정치는 가능하다고 이야기하면서, 랑시에르는 정치와 민주주의로까지 주제를 넓힌다. 

하지만 이 책은 “창시자는 그것을 이미 예언했었다. 보편적 가르침은 뿌리내리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사실 덧붙였다. 보편적 가르침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물론 제도 교육이 평등이나 해방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진보론자들의 모든 개혁 시도들이 결국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일 뿐이라는 입장은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랑시에르도 비슷하게 이렇게 말??는 것만 같다. “불평등한 질서가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그 사회와는 다른 개인들의 공동체를 작동시키는 것이 도처에서 언제나 가능하다”고. 평등의 실현을 약속하는 프로그램이 무너져버린 곳에 도래하는 것은 해방 정치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지적 평등을 위협하는 불평등의 사유에 맞서 지금 여기에서 행동해야 한다는 긴급한 요청을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