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보 독서록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다가 운동을 생각하다.

종보샘 2018. 7. 24. 05:51

“원래부터 그룹에 소속되어 여러 사람과 함께 어울려서 뭔가를 하는 게 서툴렀고, 그래서 정치 모임에는 가입하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는 학생운동을 지지했고, 개인적인 범위에서 가능한 행동은 취했습니다. 하지만 반체제 파벌 간의 대립이 심화되고, 이른바 ‘내분’으로 사람 목숨을 어이없이 앗아 가는 사태가 벌어진 뒤부터는(우리가 항상 쓰던 문학부 강의실에서도 정치에 관심이 없는 학생 한 명이 살해되었습니다) 다른 많은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그 운동의 존재 방식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거기에는 뭔가 잘못된 것, 옳지 않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건전한 상상력이 상실되어버렸다.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거센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 우리 마음속에 남겨진 것은 뒷맛이 씁쓸한 실망감뿐이었습니다. 아무리 거기에 올바른 슬로건이 있고 아름다운 메시지가 있어도 그 올바름이나 아름다움을 뒷받침해줄 만한 영혼의 힘, 모럴의 힘이 없다면 모든 것은 공허한 말의 나열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그때 몸으로 배운 것은, 지금도 확신하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말에는 확실한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힘은 올바른 것이 아니어서는 안됩니다. 적어도 공정한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됩니다. 말이 본래의 의미를 잃고 제멋대로 왜곡되어서는 안 됩니다.”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40-41쪽.

책을 읽다가 이 내용이 확 와닿았다. 그리고 궁금증이 일었다. ‘학생이 살해당했다?’ 그래서 ‘무라카미 하루키’, ‘와세다 대학’, ‘살해’ 등으로 검색하다가 ‘전공투’, ‘적군파’, ‘연합적군’ 등을 알게되어서 산악 베이스 사건 →주범들 도주 → 아사마 산장 사건 등을 읽어보게 되었다. 

내가 구축한 생각에 빠져서 ‘나는 이래야 한다. 그리고 너는 저래야한다’는 생각을 이데올로기라고 한다면, 그 이데올로기에 빠져 자신들이 경멸하는 ‘전체주의’, ‘인간성의 상실’을 집단의 결속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한다며 정당화하는 것. 많은 청년들이 ‘운동권’을 거부하는 이유가 아닐까.

적군파-내부 폭력의 사회심리학
퍼트리샤 스테인호프 지음, 임정은 옮김
교양인·1만6000원

1972년 5월31일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 습격 사건은 특히 서구인들에겐 충격적이고 낯선 것이었다. 승객들과 함께 짐을 찾던 세 남성이 난사한 자동소총과 수류탄에 불과 몇 분 만에 26명이 숨진 끔찍한 폭력성도 그러했지만,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이 사건의 범인들은 머나먼 일본에서 온 청년 셋이었다. 전세계에 ‘적군파’라는 이름이 각인되는 순간이었다.사건 직후 미국의 한 젊은 여성 연구자는 당시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에게 편지를 쓴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범인 오카모토 고조를 ‘연구’하기 위해 만나고 싶다는 요청이었다. 사회학자 퍼트리샤 스테인호프의 적군파 연구는 이렇게 시작됐다. 적군파는 일본의 학생운동사에서도 매우 독특한 위치에 있다. 바로 직전인 60년대 ‘전공투’ 세대나 더 윗자리의 50년대 세대가 학술·문화계 등에 퍼져 미약하나마 여전히 진보적 운동의 흐름을 뒷받침하는 데 비해, 적군파는 1972년 2월 아사마 산장 사건 이후 사실상 ‘궤멸’했다. 아사마 산장 사건은 신좌파 세력인 적군파와 혁명좌파가 손잡은 ‘연합적군’ 5명이 자동소총과 탄약으로 무장한 채 1명의 인질을 잡고 경찰과 열흘 동안 대치한 사건이었다. 이들이 진압되던 마지막 날 방송들의 생중계는 10시간 가까이 이어졌고 시청률은 95%에 달했다. 체제에 저항하는 ‘영웅적이고 혁명적인 행위’로 이들은 학생들은 물론 일반인들의 동정과 공감을 받았다. 바로 다음주 ‘총괄’(자아비판)이라는 이름으로 살해당한 12구의 주검이 차례차례 발견되기 전까진.무장혁명과 세계동시혁명을 추구하던 젊은이들이 왜 자신의 형과 남편을 포함한 동지들을 찌르고 때려 죽음에 이르게 했을까. 왜 죽은 이들은 조직에서 이탈할 수많은 기회를 버렸을까. 이 아픈 질문은 와카마쓰 고지 감독의 <실록 연합적군>에 이르기까지 영화로, 르포로, 만화로 일본에서 수십편이 만들어졌다. 사실 <적군파>는 한사람 한사람의 사연을 다 전하기에도, 일본의 사회운동사를 깊이 이해하기에도 부족함이 많은 책이다. 하지만 미국인이라는 외부인의 시선으로 접근해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최대한 듣고 이를 보편적 심리학 이론에 접목시키려 했다는 미덕은 그런 아쉬움을 덮어준다. 기존 연구들이 연합적군의 ‘광기’를 ‘가미카제’ 전통이나 특유의 집단적 책임의식 같은 일본 사회의 특징에서 찾으려 했다면, 지은이는 문화적 배경이 달라도 동일한 사회적·심리적 역학이 작동한다는 점에 좀더 주목한다. 연합적군은 집단폭력을 동지들의 ‘공산주의화’를 돕는 행위라고 이론화했다. 이에 대해 스테인호프는 1950년대 미국의 연구를 들어 “소규모 조직 내부의 개개인이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외부의 현실 사이에 불일치를 경험했을 때 외부의 현실에 새로운 해석을 가해 이데올로기에 모순이 생기지 않도록 했다”고 지적한다. “올바른 선택을 진지하게 행한 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도 벗어날 수 없는 사회적 경로에 무의식적으로 휘말릴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중에 돌이켜봐도 여기서 멈췄어야 할 명확한 지점은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어쩔 수 없는 비극일까. “우리 모두가 이런 비극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될 수 있다. … 이데올로기적 신념이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으로 인식한 것보다 더욱 진실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한, 그리고 조직의 결속과 지도자의 권위가 개개인이 ‘아니오’라고 말할 가능성을 짓밟는 한.”모순을 나의 마음으로 인식하기, 그것이 희망이다.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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